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메르 제국 (문단 편집) === [[원나라]]의 침략과 쇠퇴 === 인드라바르만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자야바르만 8세'''는 불교도가 아닌 독실한 힌두교도였다. 불교라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할아버지와 선대 왕들이 세운 불교 사원들을 힌두 사원들로 개조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그 유명한 [[앙코르 와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극단적인 힌두주의자였던 자야바르만 8세가 힌두교를 내세우고 불교를 탄압하며 뒤숭숭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와중, 국제 정세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13세기의 아시아는 말그대로 [[몽골 제국]]의 독주 무대였다. [[원나라]]로 대표되는 몽골 세력들이 제 앞에 거슬리는 왕국이라면 뭐든지간데 쓸어버리고 다녔던 무법천지의 시대였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최고 패권국이었던 크메르 제국마저도 전성기 시절의 원나라에 맞서 이길만한 국력은 되지 못했다. 1281년 자야바르만 8세가 몽골 사신을 투옥시키자 화가 난 중국 남부의 총독이자 [[쿠빌라이 칸]]의 신하였던 소게투가 크메르 제국을 협박했고, 결국 자야바르만 8세가 이에 굴복해 2년 후부터 원나라에 입조하고 조공을 바치며 물러났다. 하지만 자야바르만 8세는 이 사건으로 위신에 치명타를 입었고, 결국 [[몬족]]의 독립을 그대로 용인했으며 서쪽의 수코타이 왕국과의 싸움에서도 연달아 패배하며 몰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사위이자 독실한 불교도였던 '''인드라바르만 3세'''가 보다못해 1295년 자야바르만 8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크메르 제국도 본격적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나라]]가 동남아시아와 크메르 제국을 효과적으로 식민 지배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정보와 기록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성종(원)|원 성종]](元成宗) 테무르(鐵穆耳) 칸은 당시 원나라의 무역 상인이었던 '''주달관'''(周達觀, 1266~1346)에게 동남아시아의 군사적 정보와 정치 상황, 지도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오라는 칙령을 내리며 1285년 10월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항해도와 나침반의 도움으로 주달관 일행은 진랍국, 즉 크메르 제국에 무사히 진입해 들어올 수 있었다. 주달관의 방문 이후에도 원 성종(元成宗) 테무르(鐵穆耳) 칸의 명으로 크메르 제국은 [[원나라]]에게 잘 훈련된 전투 코끼리 부대를 항상 바쳐야했는데 이렇게 잘 훈련된 전투 코끼리 군대가 원나라군의 이민족 부대 중에 편성되면서 원나라는 더욱 더 군사력이 증강되었다. 황제(칸)의 칙령을 받은 주달관은 원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멀리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까지 탐험을 가서 앙코르 사원까지 둘러본 후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저술했다. 1296년 중국 원나라의 사신인 주달관(周達觀)(1266년~1346년)이 앙코르에 도착했다. 주달관은 원나라 저장성의 온주 출신으로 테무르 칸의 칙령을 받은 사신이었다. 그는 1296년 2월 20일 온주를 떠나 푸저우 항을 거쳐 하이난을 경유하고, 안남을 거쳐 캄보디아 캄퐁 참의 도시에 메콩 강 수로를 통해서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똔레삽 호수를 향해 작은 배로 갈아타고 12일을 항해하여 당시 수도인 앙코르 톰에 도착했다.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에 의하면 자야바르만 8세가 행차할 때면 가마가 수백 개가 넘었고, 해가리개는 수풀처럼 무성했으며 코끼리는 온통 황금과 보석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진랍풍토기》에도 '크메르 제국이 주변 수코타이와의 전쟁에 지쳐 전 국토가 황폐해진 상태'였다고 저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크메르 제국이 멸망의 길을 서서히 걷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